검은 우주
- 전시기간 24.11.15 - 24.12.21
- 전시장소 Artspace Hohwa
- 전시작가 김정욱, 윤미선
검은 우주
회화에 있어 우연성은 회화성 자체로 읽히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인 예술가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거나 혹은 통제하고 싶지 않은 영역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몸의 수고로운 작업 방식이나 창조된 이미지의 단순 변주와 같은 통제 가능한 영역과 대치된다. 이 두 영역의 사이에서 스스로 현현하는 것이 있다. 메를로 퐁티는 이를 승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술로 보았고, 이것은 곧 이번 전시에 김정욱과 윤미선의 회화를 나란히 둘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작품에는 작가의 신체적 행위를 통해 경험되는 감각이 긴밀하게 결부되기 때문에 그 안에 물질적 매체 너머의 상징체계가 내재된다고 보았던 퐁티의 맥락을 바탕으로 김정욱과 윤미선의 회화에서 그들의 ‘검은 우주’를 쫓아보려 한다.
먼저, 전시 제목에서의 ‘검은’과 ‘우주’로 나누어 두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 우주를 밀도 있게 담아낸 두 작가의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검은’ 색은, 그들이 수행하듯 긴 시간 갈아낸 작업의 재료에서 기원한다.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에 동물의 가죽이나 연골에서 얻은 아교로 응고한 먹을 다시 갈아 물에 섞어 겹겹이 올린 것은 김정욱의 검음이고, 자연에서 채취한 탄소 물질인 흑연에 점토를 섞어 구워 만든 연필을 종이에 수도 없이 겹쳐 칠한 것은 윤미선의 검음이다. 배경으로 자리한 김정욱의 검은색은 화면의 다른 요소들을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동시에 심연의 중력으로 모든 것을 제 자리에 고정시킨다. 닥종이에 아교포수한 지지체에서부터 시작하는 김정욱의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세필로 그려낸 수없이 많은 먹선 앞에 멈추게 된다. 검은 먹이 스며든 한지는 다시 긴 시간을 밀어내고 제 안으로 침잠하며 깊어진다. 반면, 양감이 짙은 윤미선의 검은색은 명확한 구획을 이루며 앞으로 전진한다. 그는 가까운 구체의 검은 색을 가장 어둡게 하여 강조함으로써 입체적 착시를 의도하는데 하얀 종이 위에 마모되는 흑연은 거친 질감을 그대로 남긴 채 회화로 돌아오게 한다. 아크릴로 단단히 마무리한 단색의 배경과 대조되는 윤미선의 검은 연필 선은 무수히 겹쳐지며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낸다.
다음으로 ‘우주’로 지칭할 수 있을 무형의 것에 대해서는 현존에 관한 두 작가의 질문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인간 지각의 시작점이자 외부 세계를 돌아와 다시 체류하게 되는 지점 역시 인간인데, 두 작가 역시 태초의 질문이 시작된 곳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김정욱은 유약한 나와 우리에서 나아가 자문으로써의 작업을 거치며 생 자체의 힘에서 경외를 찾는다. 이 섬세하고 명료한 발견에서 작가는 비로소 외부의 것과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 자체를 은유하는 그의 작품에는 제목이 없다. 작가는 발 딛고 선 땅의 소리와 귓가를 돌아오는 바람이 머금은 향기를 모두 섞어낸 것을 정성스럽게 빚은 화면에 그려낸다. 그것은 소녀였다가 얼굴이었다가 부처였다가 돌이나 새였다가 빛과 어둠으로 남는다. 한편, 윤미선의 우주에는 불안한 시절을 격려하듯 견고하게 구조물을 쌓아 만든 형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제 얼굴이 기하학적 원소로 해체된 퍼즐처럼 조각된 이 형상은 중세의 초상처럼 곧은 자세를 하고 앉아 화면 밖의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는 눈동자일지 모를 작고 검은 반구체에서 작가가 삼켜내어 연필 끝으로 다시 뱉어낸 질문을 읽는다. 곧 많은 질문과 그보다 많은 대답들을 쏟아낼 듯한 그는 스스로 형체를 잃고 무너질지도 모를 모양으로 그곳에 있다.
김정욱과 윤미선을 <검은 우주>로 엮어 읽으며 한지에 스민 먹과 종이에 그어진 연필선을 쫓아보았다. 두 작가가 고뇌하는 시간이 쉼 없이 쌓여 비춰지는 어둠에 빚어지는 기이한 형상들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우주를 상상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두 작가가 지나온 시간들을 겹쳐보며 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