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한 빛, 황홀의 틈 Gleam of a Silent Ecstasy
- 전시기간 25.09.02 - 26.01.04
- 전시장소 호반아트리움
- 전시작가 알레산드로 시치올드르
몇 줄의 프롬프트만으로 그럴듯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시대에 수천, 수만 번의 붓질이 모여 비로소 완성되는 회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산업, 기술, 과학이 지배한 유일신적인 세계에서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찾기 위해 분투했다. 신속함과 명료함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고,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것들이 무시된다. 한순간의 공백도 허용하지 않는 소리, 시선을 앗아가는 이미지의 난무, 그리고 이 유혹에 기꺼이 굴복해 버린 우리는 어느샌가 상상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상상력이 사치재가 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알레산드로 시치올드르는 회화를 회복의 장치로 제시한다.
작품은 역설적이다. 익숙한 동시에 낯설고, 고요한 동시에 말을 건다. 성채와 탑, 동굴과 같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장소와 성스러운 분위기의 인물들은 초현실적이면서도 미술사적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알레고리와 같은 형상들은 시치올드르가 고수하는 전통적인 페인팅 기법과 함께 신비함을 더한다. 이 기묘한 분위기를 마주한 이는 자연스레 화폭 속 비밀을 찾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스터리를 풀고자 하는 시도는 무위와 무상을 말하는 작가의 말에 가로막히고, 고전 작품에서 익히 보았던 형상은 단서가 아닌 수수께끼 그 자체로 변모한다.
시치올드르의 회화는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으며, 고정된 해석 또한 거부한다. 이것은 의도적 공백이다. 작품은 그저 현존에 의의가 있을 뿐, 의미는 관람자 사이를 떠돈다. 지시된 대상이 없는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타자의 감응이기에 시치올드르의 작업세계에서 관람자의 존재와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즉각적인 반응이나 일대일 대응의 해석, 특정 방법론에 의존하는 방법으로는 그의 작업을 충분히 읽어낼 수 없다. 대신에 작가가 제안하는 느림과 관조의 미학으로 접근해 보기를 제안한다.
컨텐츠의 폭식이 자행되는 사회 속에서 시치올드르는 회복을 위한 틈새를 만들어두었고, 이를 통해 관람자는 꿈의 세계로 초대된다. 식민화되었던 지각은 스스로의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하고 표면을 배회하는 데 익숙하던 감각은 비로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잃어버렸던 상상력은 작가가 제시하는 신화적 세계 속에서 다시금 그 물꼬를 튼다. 잠시 그림 앞에 멈추어 서서 감각에 집중해보자.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떠오르는가? 조용하지만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겹겹이 쌓인 물감의 층에 비례한 시간으로 구성된 회화는 작가에게도, 관람자에게도 수행의 기회를 제공한다. 느림과 모호함, 침묵과 사유의 시간을 잠시간 허락하라.